
지도 위 작은 점 하나, 지중해 동쪽 끝에 매달린 좁고 긴 땅이 있다. 해안 평야의 비옥한 초록빛과 네게브 사막의 황량한 모래색이 공존하고, 고대 성벽의 거친 돌결이 현대 도시의 매끄러운 유리창과 겹쳐지는 곳이다. 이곳은 누군가에게는 수천 년을 기다려 돌아온 약속의 땅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을 빼앗긴 상실의 땅이기도 하다.
뿌리 깊은 갈망과 시오니즘의 탄생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이해하려면 아주 오래전, 가나안 지역의 고대 셈어 사용자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고학적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1200년경 메르넵타 석비에 처음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며, 이들은 독특한 단일신 신앙을 통해 주변 민족과 스스로를 구분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사는 이들에게 정착의 평온함보다 유랑의 고통을 더 오래 허락했다.
유럽의 유대인들은 수 세기 동안 토지 소유 금지와 거주지 제한이라는 지독한 배제를 견뎌야 했다. 특히 나치에 의해 600만 명이 학살된 홀로코스트의 비극은 유대인들에게 단순한 슬픔을 넘어선 생존의 절박함을 심어주었다. 더 이상 취약한 소수 민족으로 살 수 없다는 깨달음, 즉 스스로를 보호할 독립적인 조국이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갈망이 현대 시오니즘 운동의 핵심이 되었다.
테오도르 헤르츨은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을 취재하며 반유대주의의 뿌리 깊은 증오를 목격했다. 그는 유대인이 사회에 동화되려 노력해도 결국 ‘외부인’으로 취급받는 현실을 보았고, 이는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이라는 거대한 흐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들의 귀환은 그 땅에 이미 살고 있던 이들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침공이자 비극의 시작이었다.
경계선 위에 세워진 불안한 평화
이스라엘의 영토를 정의하는 일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국제사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면적은 약 20,770㎢로 우리나라의 전라도 크기와 비슷하지만, 실제 실효 지배 면적은 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골란 고원 등을 포함해 약 28,000㎢에 달한다. 이 수치의 차이 속에 바로 이 지역의 모든 갈등이 응축되어 있다.
특히 골란 고원은 전략적 요충지이자 비옥한 땅이기에 시리아와의 갈등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미 1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국민이 정착해 살고 있어 반환 요구를 거부하고 있지만, 그곳에 원래 살던 시리아인들의 삶 또한 지워지지 않은 채 얽혀 있다. 홍해의 유일한 항구도시 에일라트가 가진 11km의 짧은 해안선조차 지정학적 운신의 폭이 좁은 이스라엘에게는 생존을 위한 절박한 통로가 된다.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를 둘러싼 분쟁은 이제 단순한 영토 싸움을 넘어 종교와 민족, 그리고 생존권의 충돌로 변했다. 하마스가 통치하는 가자 지구의 폐쇄성과 이스라엘의 군사적 통제는 서로를 향한 증오를 키우는 악순환의 고리가 되었다. 평화라는 단어는 이곳에서 가장 값비싸고도 얻기 힘든 사치품처럼 느껴진다.
파괴된 상징과 지워지지 않는 상흔
최근 레바논 남부 데벨 마을에서 발생한 사건은 이 갈등이 얼마나 감정적이고 파괴적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한 이스라엘 군인이 망치로 예수상의 머리를 부수는 장면이 공개되었을 때, 세상은 경악했다. 이스라엘군은 이를 개인의 일탈이라며 군의 가치관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해명했지만, 이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성서의 누가복음 구절인 “아버지, 그들을 용서하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는 문구가 SNS를 통해 공유된 것은 역설적이다. 종교적 상징물을 파괴하는 행위는 단순한 기물 파손이 아니라, 상대의 정체성과 신념을 말살하려는 폭력의 투영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이스라엘이 국제법 위에 군림하며 민간 시설과 종교적 상징물을 무분별하게 훼손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전쟁의 참혹함은 통계 수치보다 개개인의 삶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성폭력 논란과 언론인 살해, 병원과 학교의 파괴라는 참혹한 소식들이 들려올 때마다, 1948년 건국 당시 그들이 꿈꿨던 ‘안전한 조국’의 의미는 퇴색된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 그리고 새로운 피해자가 된 원주민들의 서사는 이 땅을 거대한 눈물의 바다로 만들고 있다.
공존이라는 불가능한 과제에 대하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단순한 ‘선과 악’의 구도로 설명될 수 없다.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최악의 비극을 겪은 이들의 생존 본능과, 대대로 살아온 땅을 빼앗긴 이들의 저항권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측 모두에게 이 땅은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이며, 그렇기에 타협은 배신으로 여겨진다.
결국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정의의 충돌’이다. 나의 정의가 상대의 불의가 되는 비극적인 구조 속에서, 무력은 일시적인 억압을 가져올 순 있어도 영원한 평화를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파괴된 예수상을 복원한다고 해서 부서진 마음과 무너진 신뢰까지 복원될 수 있을까. 증오의 대물림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영토의 선을 긋는 일보다 마음의 벽을 허무는 일이 먼저여야 한다.
우리는 이 먼 나라의 비극을 보며 무엇을 배워야 할까.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확신이 얼마나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라는 울타리를 치는 행위가 어떻게 ‘그들’을 괴물로 만드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과연 이 땅에 증오가 아닌 공존의 서사가 쓰이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여러분은 이 끝없는 평행선 같은 갈등의 해결책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